KBS 1라디오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인 신성원의 문화 읽기에서 여러 문학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악(대부분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이 흐르는 문학이라는 코너를 좋아해서 매주 빠짐없이 듣는데 어제는 방송 최초로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의 오르페우스의 창(オルフェウスの窓, 국내명 올훼스의 창)이라는 일본 만화를 소개했습니다.
요즘 EBS를 통해 TV판 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를 보고 있지만 정작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는 전혀 본 적이 없기에 한층 관심을 두고 들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 말에 해적판 만화로 소개되었지만 당시 군사정부 시절이라 만화의 배경인 러시아 혁명 때문에 도중에 핀란드 독립운동으로 바뀌었고 민중 봉기를 그린 내용 때문에 출판이 중단되었다가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1990년대에 원래의 배경인 러시아 혁명을 충실히 그린 해적판이 다시 나와 우리나라 독자들이 혼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케다 리요코가 이 만화를 창작하기 위한 자료 수집차 유럽을 여행하다가 이 만화의 배경인 독일의 레겐스부르크에 하루 묵게 되는데 당시 젓가락을 사용하는 동양인을 신기하게 봤는지 젓가락 비슷한 작대기 2개로 콩을 집어보라는 여관 주인의 부탁을 받아들여 시범을 보여줬더니 기뻐하며 음식을 공짜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자신이 음악학교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기 위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하자 근처 음악학교에 한국인 유학생이 있다고 소개해줘서 그 음악학교를 찾아가 그 여학생과 영어로 소통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중에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일본의 나고야라고 해서 한국인이 아니냐고 되묻자 일본인이라고 하여 결국 일본인끼리 힘들게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 꼴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미소 냉전 시절이라 구소련을 방문하려면 당국에 여행 사유서를 적어야 하는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작품을 쓰기 위해 왔다고 썼더니 러시아 혁명에 대해 어떻게 쓰겠느냐는 질문을 하자 매우 긍정적으로 쓰겠다고 답변한 것이 좋았는지 흔쾌히 안내원까지 붙여줘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여러 자료를 쉽게 조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케다 리요코는 현재 만화가를 그만두고 자신이 원했던 음악의 길을 선택해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는데 어제 방송을 들은 후 엔하위키와 일본 위키피디아에서 이 만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위에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어서 꽤 좋은 정보를 얻은 듯하고 기회가 되면 만화도 구매해 읽어봐야겠습니다.

[추가]
클래식 관련 사이트인 고!클래식에서 김재용 님께서 매우 자세하게 쓰신 글이 있기에 인용합니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곧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이케다 리요코(池田 理代子)는 1970년대부터 8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과 같은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에 큰 인기를 끌며 당시 청소년기를 보낸 수많은 여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가상인물인 남장여성 오스칼과 실존인물 마리 앙투아네트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다. 2년 동안 연재한 분량은 이후 10권의 단행본으로 다시 발표되었고, 이 책은 현재까지 100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하며, 심지어 이 작품의 영향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하게 된 사람들의 수도 상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베르사유의 장미>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다른 매체로의 각색으로 이어졌다. 1974년 타카라츠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은 <베르사유의 장미>를 무대에 올렸고,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타카라츠카 가극단은 여성 배우가 남장을 하고 남성 역할을 맡는 독특한 형태의 구성을 고집하는 극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여성 국악인들만으로 구성된 여성국극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여성국극이 사양길에 들어선 것과는 달리, 일본의 타카라츠카 가극단은 오늘날까지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연극에서 남장여성 오스칼이 주인공인 <베르사유의 장미>는 가장 잘 어울리는 레퍼토리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이 연극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계속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2006년 1월 9일에는 통산 공연 1500회를 기록하였고, 같은 해 3월 17일에는 통산 관객 400만 명을 기록하며 타카라츠카 가극단 최고의 히트작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여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내한공연이 있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TV 애니메이션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총 40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1979년 10월 10일부터 1980년 9월 3일까지 일본에서 처음 방영되었다. 연출은 데자키 오사무(出崎 統) 감독이 맡았고,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어 큰 인기를 모았다. 1990년 처음 비디오로 나왔으며, 공중파에서도 1993년과 1997년, 그리고 2011년까지 세 번에 걸쳐 방송되었다.

<베르사유의 장미>의 각색 목록은 1979년 프랑스와 일본 합작으로 제작된 <레이디 오스카(Lady Oscar)>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이어졌다. 1964년 영화인 <쉘부르의 우산(The Umbrellas Of Cherbourg)>의 명콤비 자크 드미 감독과 미셸 르그랑 음악감독이 다시 손을 잡았고, 실제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촬영을 하는 등 상당한 공을 들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는 별개로 영화로서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원작의 비극을 해피엔딩으로 각색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였고, 특히 오스칼 역의 배우가 원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이 배우의 이름은 카트리오나 맥콜(catriona maccoll)이다. 지금은 이탈리아 호러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며, 독일에서는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 심지어 이 영화를 촬영한 프랑스에서는 아예 개봉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이 영화가 실패한 사실과는 별개로, 마리 앙투와네트에 대한 이야기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를 통해 프랑스의 역사, 언어, 음식, 문화 등을 널리 알렸다고 하여 2009년 3월 11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장을 받았다.

<베르사유의 장미>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시기는 1970년대였다. 번역된 책에는 당시의 관행대로 작가 이름으로 이케다 리요코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한국 이름이 적혀있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거의 열 종 가까운 해적판이 출판되었는데, 그 중 여러 출판사의 책에서 정영숙이라는 이름으로 작가가 소개되었다. 여류만화가 황미나도 상당히 오랫동안 <베르사유의 장미>의 작가가 정영숙이라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이 책의 작가로 마리 스테판 드 바이트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마리 앙트와네트 - 어느 평범한 여성의 초상>이라는 역사소설을 쓴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의 이름을 변형한 것이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누가보아도 여류만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보였기 때문에 스테판 츠바이크의 이름을 그대로 쓰기 어색하다 싶었던지 앞에 마리라는 이름을 붙여서 스테판 드 바이트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케다 리요코는 1973년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를 끝내고 제대로 된 작품을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작품이 바로 <올훼스의 창>이다. 이 만화는 1975년부터 1981년까지 7년여에 걸친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혁명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독일과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며, 실제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대하 역사극을 완성시킨 것이다. <올훼스의 창>이라는 제목의 올훼스는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 책은 오르페우스 신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음악학교에는 올훼스의 창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 서서 처음 본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불행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는 전설이 소개된다.

이케다 리요코는 이전부터 음악학교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그리고 싶은 생각을 가져왔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작가가 클래식 애호가라는 사실과 연결되는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작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심지어 할아버지 장례식 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려 어머니에게 야단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작가는 초등학교 입학했을 무렵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보통 학생들처럼 레슨을 여러 차례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후 음대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본격적인 레슨을 받게 되었지만 고민 끝에 음대 진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정도의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이후 한 번도 피아노 없는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살던 방에는 반드시 피아노가 있었다고 하며, 수십 번 이사를 갈 때에도 무거운 피아노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작품을 그리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올훼스의 창>에서 주인공인 이자크가 사용한 무거운 건반의 피아노도 <베르사유의 장미>를 그렸을 무렵 가지고 있었던 디아파송이라는 피아노이며, 또 이자크가 주점에서 쳤던 돌프 레만이라는 피아노도 실제로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 골동품 피아노라고 한다.

작가가 <올훼스의 창>을 구상할 때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악기인 피아노 전공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음악학교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도 어려서부터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던, 하지만 음대에는 가지 못했던 작가의 동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학교는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아니라 독일에 있는 학교로 설정했는데, 이는 이케다 리요코가 영어 외에 아는 외국어가 독일어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를 그리면서도 프랑스어 자료를 보지 못하고 영어와 독일어로만 읽어야 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베르사유의 장미>를 그릴 때 다음 작품은 독일을 무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서 이케다 리요코가 좋아한 음악은 베토벤과 브람스 등의 독일 음악이었다.

작품 초반부의 무대가 되는 음악학교는 레겐스부르크라는 도시에 있다. 사실 이곳은 파리나 빈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니다. 이곳을 그리게 된 것은 작가의 우연한 경험 때문이다.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를 끝내고 한 달 반 정도의 일정으로 파리와 영국 등을 자유롭게 여행했다. 빈에서 파리로 가는 열차를 타던 중 해가 저물자 레겐스부르크라는 도시에 내렸다고 한다. 역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 하루 정도 더 머물기로 결정하고 호텔로 갔다. 체크인을 하고 밤이 되자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 때는 10월이었고 눈 속에 빨간 장미가 피어 있는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작가는 그곳을 배경으로 음악학교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그리려고 결심한 것이다.

그 당시 독일의 소도시인 레겐스부르크는 일본인을 처음 본 사람들이 많았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레스토랑 지배인이 삶은 콩과 막대기 두 개를 가져와 젓가락질을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케다 리요코는 싫은 기색 없이 젓가락으로 콩을 집었고 주위에서 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무료로 식사를 제공받았고, 식당의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올훼스의 창>의 교장선생은 바로 이 레스토랑의 지배인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또 레스토랑에서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멋있게 생겼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올훼스의 창> 등장인물인 헤르만 빌클리히 선생의 모델이 되었다. 그 사람과 친해진 뒤 자신은 음악 공부하는 젊은이 만화를 그릴 예정이라고 이야기 했고, 그 사람은 마침 한국인 여자 유학생이 레겐스부르크에 있다고 말하며 음악학교 기숙사로 안내해주었다고 한다. 이케다 리요코는 그 학생과 음악학교 생활에 대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화 도중 그 유학생은 자신이 나가노 출신이라고 말했다. 어? 아 유 재패니즈? 예스! 한국인이 아니었다. 일본어로 이야기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그 때 안내받은 레겐스부르크 음악학교의 기숙사 이미지는 <올훼스의 창>에서 그대로 사용되었다.

<올훼스의 창>의 3부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프랑스 혁명을 그렸으니, 다음 작품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그릴까 항상 생각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음악학교 학생 중에서 러시아에서 온 인물을 등장시켰다. 음악학교와 러시아 혁명이 하나의 작품 속에서 만난 것이다. 이 작품의 시대 설정이 20세기 초반인 것도 이 시기가 피아노 음악이 가장 활발하던 때였다는 사실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때라는 점을 모두 고려한 것이다.

이케다 리요코는 작품을 연재하던 중에도 독일에 여러 번 오가며 자료를 조사했다. 그리고 소련에도 다녀왔다. 당시는 일본인도 소련에 가기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 시기였다. 소련에는 통역 겸 가이드가 있어야 여행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케다 리요코가 처음 여행을 허가받기 위해 소련 당국에 어떤 목적의 여행인지 서류에 기재하여 신청해야 했다. 이케다 리요코는 혁명을 주제로 작품을 그릴 예정이라고 적었고, 곧장 혁명을 긍정적으로 묘사할 예정인가 부정적으로 묘사할 예정인가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아주 긍정적으로 그릴 예정이다. 그럼 허락한다. 이케다 리요코의 답변 덕분에 소련 당국의 호의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간의 제약 때문에 막연하게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거리 분위기만 익히고 돌아왔지만, 두 번째 방문부터는 혁명 당시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그릴 장면을 일일이 서류로 작성하여 소련 당국에 제출했다고 한다. 덕분에 소련 당국의 안내로 혁명의 무대에 나오는 곳을 모두 돌아볼 수 있었다. 보통 관광객들에게는 정해진 코스만 허락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지만 이케다 리요코는 특별히 여러 곳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혁명 당시 은신처와 신문을 만들었던 아지트, 뒷골목과 지하도, 그리고 당시 모습이 보존된 방의 내부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가들이 어떻게 해서 비밀 인쇄물과 신문을 몰래 읽을 수 있었는지, 그런 상황을 면밀히 조사할 수 있었다. 다만 정해진 곳이 아니면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기억한 뒤 나중에 스케치를 해야만 했고, 몰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기차에서 찍은 바깥 풍경을 담은 필름을 한 번 빼앗긴 적도 있었지만, 숨겨놓은 사진기 덕에 여러 장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케다 리요코의 노력 덕분에 <올훼스의 창>에는 러시아 혁명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을 다룬 작품이 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출판되기 힘들었다. 클라우스가 러시아로 간 이유는 볼셰비키 혁명을 위해서였지만,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책에서 묘사된 러시아 혁명을 핀란드 독립혁명으로 바꾸는 편법을 사용해서야 출판될 수 있었다. 덕분에 책 속에 나오는 모스크바는 투르크로, 페테르부르크는 헬싱키로 지명도 다르게 표기되었다. 그러니까 클라우스가 핀란드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인 것처럼 각색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편법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유리우스가 클라우스를 찾아 러시아로 떠나면서 1부가 끝났는데, 갑자기 핀란드로 배경을 바꾸다보니 앞부분의 내용과 연결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없던 내용을 추가하여 앞에서 나온 이런저런 그림을 복사해서 짜 맞힌 뒤 새로 지은 대사를 집어넣었다. 유리우스는 러시아로 클라우스를 찾아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클라우스가 핀란드에서 독립운동을 돕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핀란드로 왔다. 클라우스 당신은 왜 나에게 러시아로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가. 이런 대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핀란드로 무대를 바꾸었어도 민중혁명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내용은 당시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해이다. 결국 <올훼스의 창>은 13권까지만 나오고 더 이상 발간되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올훼스의 창> 후속편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다음 편을 요구하는 독자들의 요구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중간에 끊긴 <올훼스의 창>의 이야기를 담은 엉뚱한 소설이 한국에서 나왔다. 물론 원작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책이었다. 유리우스가 유스포프의 아이를 임신하고, 이자크가 암으로 죽고, 클라우스와 유리우스가 독을 마시고 올훼스의 창에서 떨어져 죽는 내용이 이어졌다.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와 전혀 다르지 않는 전개이다. 8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에서 제멋대로 만들어낸 번외편이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던 또 다른 히트만화 <캔디 캔디>도 이런저런 번외편이 한국 작가들의 손에서 나왔다. 떠나간 테리우스가 다시 캔디에게 돌아왔다거나, 안소니와 캔디가 알고 보니 쌍둥이 남매였다거나. 이런 식의 내용을 담은 책이 출판되었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지금 팬픽이 정본인 것처럼 소개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올훼스의 창> 만화와 이것에 기반을 둔 번외편, 그리고 창작소설은 대부분 스테판 드 바이크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왔다.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붙인 가상의 작가 이름이 계속해서 이어진 것이다. <올훼스의 창>에 이르면 이 가상작가의 프로필까지 창작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프로필에는 스테판 드 바이크는 네덜란드 인으로 프랑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고, 대표작으로는 <베르사유의 장미>와 <올훼스의 창>이 있다고 되어있다.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린 뒤인 1989년이 되어서야 <올훼스의 창> 14권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 시대가 바뀌었는지 이 책에서 나오는 핀란드 독립혁명이 러시아 혁명으로 다시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앞의 책을 열심히 읽어온 독자들은 핀란드 독립투사라고 소개되었던 클라우스가 갑자기 왜 러시아에서 러시아 혁명을 위해 싸우는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오류를 바로잡은 <올훼스의 창> 정식 번역본은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그러니까 2001년이 되어서야 정식 계약을 맺고 나올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이케다 리요코의 이름도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올훼스의 창>은 이케다 리오코가 지녀왔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동경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한때 음대에 입학하고 싶어 했지만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던 작가의 아쉬움이 음악학교를 무대로 하는 설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작가는 <올휘스의 창>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2부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음악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올훼스의 창> 2부는 이자크가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자크가 음악가로 성공하는 데에 큰 자극이 되어준 다섯 살 위의 피아니스트가 등장한다. 바로 실존인물이기도 한 빌헬름 박하우스이다. 박하우스는 <올훼스의 창> 1부에서도 유망한 신인 피아니스트로 몇 차례 언급되었지만, 작품 속에 등장한 것은 2부부터이다. 이자크는 빈에서 하루 상관으로 아르투르 슈나벨과 빌헬름 박하우스의 연주를 듣게 되고, 박하우스의 베토벤 해석에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아르투르 슈나벨의 “계시에 가득찬 피아노에 비하면 빌헬름 박하우스의 연주에는 혼이 깃들여있지 않다”고 평가절하한다. 이자크는 박하우스는 “단지 베토벤을 잘 치는 기술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기사를 읽고, 박하우스의 연주야말로 “베토벤이라는 것”을 모두 모르는 사실에 분개한다. 이자크는 자신이 박하우스의 연주처럼 “한 번만 그렇게 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올훼스의 창> 2부에서 박하우스는 이후로도 몇 차례 언급된다. 빈에서 데뷔 공연을 갖게 된 이자크는 지도교수인 쇤베르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쇤베르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이란 정신이며 정서의 예술이다. 단지 기술적으로 치면 되는 것이 아니지. 분명 박하우스는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비범한 기술과 음악적인 지성을 지니고 있어. 하지만 슈나벨이 가진 영감의 깊은 정서의 표현에는 비교도 안되는 것이야. 그런 것은 영국이나 미국에서나 환영받는 것이지, 정말로 음악을 이해하는 국민에게는 금방 싫증을 느끼게 해” 이에 대해 이자크는 “저는 박하우스가 기술만의 피아니스트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다음과 같이 속으로 항변한다.
“가슴을 뚫는 듯한 호쾌하고 산뜻한 연주는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저 빈틈없는 당당한 테크닉은 예술가의 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인가!”

<올훼스의 창> 2부에서 이자크는 빈에서의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갖게 되고, 루빈스타인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는 신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누리게 된다. 실제로 1905년 루빈스타인상 수상자는 빌헬름 박하우스였다. 이자크가 루빈스타인상을 수상했다는 작중의 묘사는 박하우스의 이력에서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성공한 피아니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이자크는 박하우스와 다시 만난다. 피아노 연주의 비결을 묻는 이자크의 질문에 박하우스는, 피아노 연주의 모든 기본은 음계과 연습, 그리고 바흐라고 말한다. 음계, 즉 스케일은 일정한 음정의 순서로 음을 차례로 늘어놓은 것이다. 악기를 처음 익힐 때부터 반드시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보통은 직업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이런 음계 연습을 계속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음계를 강조한 부분은 박하우스가 실제로 자주 했던 말이다. 박하우스는 테크닉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항상 음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박하우스는 <올훼스의 창> 4부 마지막에도 다시 등장한다. 이자크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을 때,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박하우스는 레겐스부르크의 시골마을로 이자크를 찾아온다. 아버지를 닮아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던 이자크의 아들은 박하우스와 함께 레겐스부르크를 떠나게 된다. 박하우스가 제자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자. 아마 이자크의 아들인 유벨이 그런 원칙을 깰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케다 리요코는 언젠가 <올훼스의 창>의 번외편을 그리게 되면 아지크의 아들 유벨의 이야기와, 이자크가 대작곡가가 되어 성공하고 죽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케다 리요코의 <올훼스의 창> 덕분에 음악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도 박하우스의 이름은 잘 알려지게 되었다. 학생 시절 이 만화를 외울 정도로 읽었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빌헬름 박하우스라는 피아니스트가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무척 즐거워했다고 한다. 박하우스가 세상을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히 높은 편이다.

참고로 박하우스가 등장하는 다른 일본 만화도 있다. 츠다 마사미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을 보면, 아리마가 유키노의 집으로 들고 갔던 음반이 바로 박하우스가 연주한 브람스 협주곡 2번이었다.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니와 협연한 1967년 녹음이다. 아라마는 유키노에게 박하우스의 이 음반을 빌려주고 싶어 했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예고 없이 찾아간 아리마에게 아무렇게나 하고 있던 유키노는 당황하여 옆차기를 날리게 된다. 이 만화에서 유명한 장면이기 때문에 기억하시는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이 만화를 그린 츠츠다 마사미도 자신의 취미가 클래식 음악 감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 적이 있다.

이케다 리요코는 <올훼스의 창>으로 1980년 제9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이케다 리요코는 이후 <디어 브라더(おにいさまへ…)>, <클로딘...!(クローディーヌ…!)>과 같은 여러 히트작을 꾸준히 발표하며 일본 최고의 만화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86년 나폴레옹의 일생을 다룬 <영광의 나폴레옹 - 에로이카(栄光のナポレオン-エロイカ)>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는 <에로이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를 마친 뒤 마리 앙투아네트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계획은 늦춰졌고, <베르사유의 장미>를 마친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이 작품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르사유의 장미> 후속편 격인 작품답게,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왔던 베르나르 샤트레, 로자리 라 모리엘, 알랭 드 수아송 등이 이 작품에도 등장한다. 특히 알랭 드 수아송은 <에로이카>의 중반까지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사실 <베르사유의 장미>에서도 나폴레옹이 한 장면 인상 깊게 등장하기도 했다. <베르사유의 장미>와 <올훼스의 창>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순정만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에로이카>는 본격적인 역사물에 가깝다.

<에로이카>라는 제목은 분명히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즉 ‘에로이카(Eroica)’에서 나온 것이다.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 <에로이카>에도 이 교향곡과 관련된 일화가 짧지만 강한 인상을 전해주며 잠깐 소개된다. 이케다 리요코가 그린 베토벤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초상화 속 베토벤의 모습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다. 참고로 <에로이카> 전편에 걸쳐서도 나폴레옹의 모습은 초상화에 근거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작품에 나오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나폴레옹의 여러 초상화를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에로이카> 연재를 끝내고 이케다 리요코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만화가로서 성공했다. 앞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앞으로의 인생은 덤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앞에 악보가 보였다고 한다. 이케다 리요코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음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음대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 때가 45세 때였다. 사실 이케다 리요코는 무슨 일이건 제대로 하자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를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부족하다 싶은 생각에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미대 학생에게 석고 데생부터 유화 등 차례로 배웠는데,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 도중 그림체가 조금 바뀐 것도 이 영향 때문이다.

이케다 리요코는 1995년 4월 동경 음악대학 음악학부 성악과에 47세의 나이로 당당히 합격하였다. 전공은 어린 시절 공부했던 피아노가 아니라 성악이었다. 늦은 나이로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노래를 부르는 일에도 계속 흥미를 가져왔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케다 리요코가 특례 입학이 아니라 시험을 보고 당당히 합격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교과목을 다시 공부하고, 하루에 8시간 씩 피아노를 연습하고, 성악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시험에서 이케다 리요코는 독일어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이케다 리요코의 음대 입학은 당시 일본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40대 후반의 정상급 만화가가 작품 활동을 중지하고 10대 후반의 학생들과 함께 대학에 입학한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케다 리요코가 학교를 끝까지 마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40대 후반의 나이에 성악을 공부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척 힘든 일이었고, 만화가로서의 활동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지도교수인 히가시 교수도 이케다 리요코가 3학년이 되었을 때, 금방 그만 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0대 후반의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것은 이케다 리요코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동급생에게는 “선생님, 베르사유의 장미를 그린 분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하며, 또 어머니의 부탁으로 사인을 부탁하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케다 리요코는 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성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음대 졸업 이후 만화를 그리는 것보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활동을 우선하고 있다. 특히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오페라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케다 리요코는 실제 오페라 무대에도 성공적으로 데뷔했으며, 또한 나레이션 오페라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오페라를 재구성하는 작업도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복잡한 오페라를 알기 쉽게 재배치한 대본을 쓰고, 직접 노래도 불렀다.

이케다 리요코는 일반인들에게 오페라의 매력을 알리기 위한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공주의 미소 - 행복해지는 오페라>라는 제목으로 유명 오페라 아리아를 선곡한 음반을 출시하여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였고, <지식 제로로부터의 오페라 입문>이라는 책도 저술하여 50편의 유명한 오페라를 4컷 만화와 함께 알기 쉽게 소개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밖에 일본의 음악평론가들이 쓴 오페라 관련 책의 일러스트를 맡는 등, 일본의 오페라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이케다 리요코는 2001년 성악가로서의 바쁜 일정 중에도 <니벨룽의 반지(ニーベルンクの指輪)>라는 작품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을 만화로 풀어놓은 것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네 편의 오페라를 모아놓은 것이다. 내용은 바그너가 직접 고대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의 전설집인 사가(saga) 및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를 적절히 가감하여 창작한 것이다. 참고로 니벨룽의 노래는 <올훼스의 창> 1부에서 레겐스부르크의 축제에서 음악학교 학생들이 공연하는 장면이 있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네 편의 오페라가 이어지는 장대한 길이와 신화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고, 덕분에 어지간한 음악애호가들도 이 대작의 줄거리를 모두 기억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케다 리요코는 <니벨룽의 반지> 연작을 네 권의 만화로 쉽게 풀어주었고, 덕분에 이 만화를 본 사람에게 바그너의 작품에 쉽게 입문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았다.

이케다 리요코의 활동 중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부분은 <베르사유의 장미>의 작가답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작곡한 노래 16곡을 발굴하여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불러 녹음했다는 사실에 있다. 몇 곡은 이미 녹음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세계 최초로 녹음된 것이다. 이 음반은 2005년 마리 앙투아네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출시되었다. 출시일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일인 11월 2일이다. 이케다 리요코의 실제 노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녹음이다.

이케다 리요코는 성악가로서의 활동이 메인이고, 만화는 일종의 부업이라고 선언한 상태이다. 물론 지금도 아사히 신문에 <베르바라kids(ベルばらkids)>라는 제목으로 <베르사유의 장미>의 어린이판 연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만화는 4컷의 짧은 작품이기 때문에 성악가로서의 활동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분량이다. 그런데 이케다 리요코는 2007년 성악 우선의 원칙을 깨고 예외적으로 만화가로서 대작을 다시 시도하였다. 바로 배용준 주연의 한국 드라마 <태왕사신기>이다. 이케다 리요코는 이 작품에 대해 자신이 그리는 코와 턱의 라인이 배용준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또한 욘사마의 열렬한 팬인 가장 친한 친구가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케다 리요코씨는 수개월간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배용준의 모습을 표현한 원화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눈이 속쌍꺼풀이면 악인처럼 보이기 때문에 쌍꺼풀로 만들었고, 육감적인 입술도 남성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상당히 고생했다”고 말했다. <태왕사신기> 드라마의 일본 방송과 맞춰서 만화가 연재되었고, 이케다 리요코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오페라 활동을 잠시 쉬고 제주도 촬영현장에 취재를 다니고 틈틈이 한국의 고구려사를 연구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욘사마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PC98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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